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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13

by 토페 posted Dec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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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Owl City - The Saltwater Room>










 마침내 런칭파티 준비가 마무리됐다. 코앞으로 다가올 런칭파티를 언론은 집중해서 보도했다. 얼마나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지 전세계 신문구석에 슈가 스튜디오라는 이름이 반드시 박혀있었다. 리셉션은 뉴욕을 사버릴 정도로 준비하라는 윤기의 말마따나 모든 게 최고급이었다. 잡심부름을 하며 석진과 레이첼을 조금씩 도와준 지민마저 화려함에 질릴 정도였다. 고작 그 하루를 위해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수석디자이너를 불러 웨이터와 웨이트리스의 옷을 맞춤 제작했고, 리델 와인잔 블랙타이 시리즈를 천 개가 넘는 수량으로 준비했으며, 세계 3대 교향악단에 속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불렀다. 복도를 장식하는 꽃병마저, 커튼마저 명인에게 따로 부탁했다. 말 그대로 연회장에 금칠을 했다. 지민은 가기 전부터 파티의 화려함에 기가 질렸지만, 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언론 반응을 체크했다.



"이 정도 홍보효과에 이 가격이면 싸네요."



 지민에 뒤이어 탕비실로 따라 들어온 석진은 어거스트 회장의 세컨드비서다운 면모를 보이며 우스갯소리까지 덧붙였다. 리셉션 가서 운명의 상대라도 찾아봐요. 그럼 일 때려칠 수 있잖아요. 농담이 아예 빈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어거스트의 비서 자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이들 중에는 상류층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신데렐라들이 더러 있었다. 지민은 호텔에서 사온 금가루를 뿌린 송로버섯 베이글을 접시에 예쁘게 담으며 맞받아쳤다.



"에이 선배님 제가 그래도 산타가 있다고 믿을 나이는 지났어요."

"왜요. 한탕 꿈 꿀 수도 있잖아요. 지민 전에 들어왔던 사람 중에 미스터 윤이랑 사귀겠다 하는 사람도 있었는걸요."

"…혹시 그분 맹수조련사가 꿈이셨던 거예요?"



 석진이 푸핫 웃었다. 그럴 리가요.



"얼마 만에 쫓겨났더라. 3일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은근슬쩍 손을 잡았거든요."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쭈뼛 선다. 민윤기와 스킨십을 할 생각을 하다니. 그 배짱이면 비서가 아니라 스파이로 활동해도 충분할 것이다. 석진이 질겁하는 지민을 부추기듯 하하 웃었다.



"그래도 얼굴은 괜찮잖아요."



 지민은 푸스스 웃으며 놀리지 말라 답했다. 얼굴만 보고 좋아했으면 한참 전에 저도 쫓겨났을 걸요. 그러면서도 손은 컵에 물을 담아 쟁반에 올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런히 놓으며 윤기의 간식을 완성했다.



"저 가볼게요."

"조심해서 들고 가요."



 물을 마시며 석진이 손을 흔들었다. 지민은 요즘만 같은 날들이 반복됐으면 좋다 생각했다. 정시퇴근시간에 걷는 뉴욕 길거리는 무척이나 상쾌했다. 무엇보다 굉장한 건 윤기가 이름으로 불러준다는 점이었다. 드디어 사람 취급을 해주는 구나. 부르면 재깍재깍 오지 못하겠냐며 혼나는 일이 줄었다. 어찌나 기쁜지 지민은 윤기의 손을 꼭 잡고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좀 살만한 직장으로 변하지 않을까.



"미스터 윤, 베이글 가지고 왔습니다."

"어."



 윤기가 보고 있던 서류를 덮어 한쪽으로 밀었다. 그러더니 피곤한 듯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당연도 했다. 윤기의 스케줄은 혹독했다. 엊그제는 중국지사에 방문했고, 어제는 오전에 인터뷰를 하고 오후에는 주주총회를 가졌으며, 교육부 장관과의 저녁식사를 마쳤다. 지민은 쟁반을 내려놓으며 하얀 얼굴을 힐끔 잠시 훔쳐봤다. 가만 보니 요즘엔 애인도 안 사귀는 거 같던데. 애인 선물을 사다 바치라는 명령을 하지 않은 걸 보면 사귀지 않는 게 확실하다. 항상 바빠도 연애할 시간은 많았던 거 같은데 요즘 진짜 바쁜가 보네.



"런칭파티 때 입을 옷 받아서 내 집에 갖다 놔. 여기 서류도 같이. 열쇠는 레이첼한테 받아."



 지민은 솟구치는 입꼬리를 볼살을 깨물며 참았다. 윤기의 집에 들어갔다 나오는 건 레이첼이 담당하고 있었다. 못미더운 비서가 집에서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 출입금지의 이유였다. 내가 좀 쓸만하죠, 나 뽑길 잘했죠. 거 보라며 지민은 방방 뛰고 싶은 발을 누르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간 다음에 사무실로 돌아올까요?"

"됐어. 퇴근해."



 포크와 나이프를 들며 윤기가 연이어 말했다.



"그리고 내가 캘리포니아 가있는 동안 감상문은 진한테 보내."

"네? 저도 가는 거 아닌가요?"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내가 언제 너도 따라오라고 말했어?"

"아…."

"꿈에서 들었나? 현실과 꿈은 구분해. 넌 안가."



 안돼 내 싸인. 지민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뷔랑 하는 악수는. 캘리포니아 호텔이랑 고급 수영장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있는 볼은 괜히 울고 있는 아기를 더 놀려보고 싶은 것처럼 꼬집기 좋게 변했다. 그래도 민윤기 없는 사무실이라면야. 아쉬움이 컸지만 혼자 출근하는 사무실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런칭파티를 비롯해 슈가 스튜디오 건물을 돌고, 어거스트 일렉트릭을 방문하는 일정은 총 4일이 걸린다 했다.



"그리고 가 있는 동안 사무실엔 나올 필요 없어. 감상문만 보내."

"4일 전부 다요?"

"왜? 나오고 싶어?"

"……."

"나와서 일 치는 거 안 바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마. 가봐."



 베이글을 입에 넣는 윤기는 무표정이었다. 집무실을 나온 지민은 난데없이 떨어진 절호의 행운에 오히려 귀가 먹먹했다. 세상에. 말도 안돼. 휴가다. 그것도 주말까지 포함하면 6일 휴가. 볼을 꼬집은 지민은 제 발이 땅에 붙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행복에 몸서리쳤다. 세계평화가 이뤄지면 이런 기분이겠지. 윤기의 뺨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이 행복이면 윤기가 그 자리에서 베이글이 맛 없다 얼굴에 던진다 해도 웃으면서 맞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짜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구름궁전으로 향하는 길목을 걷는 하루다.







 지민은 기사가 내려준 하우스저택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윤기가 회사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실수라도 하나 할까 절로 위축이 되었다. 총 5층이라 했던가. 맨해튼을 양탄자로 깔아 쓴다는,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펜트하우스에서 살다 질린다며 적당히 옮긴 집이라 했다. 로빈츠 하트만 회장이 죽기 전 윤기가 살던 하트만 가의 저택에 비하면 아주 소박한 집이었지만, 이마저도 살인적인 뉴욕 집세를 고려할 때 지민이 알면 뒷목을 잡을 가격인 것은 분명했다.

 차에 탈 때부터 내내 긴장한 지민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좋아, 레이첼이 당부한 대로만 하면 괜찮을 거야.



"와…."



 입구부터 감탄한 지민은 차에서 내내 외운 레이첼이 한 말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한번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요, 지민. 다른 방은 일단 절대 들어가면 안돼요. 들어가는 순간 숨도 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문 따고 들어가자마자 1층에 있는 옷방에 런칭파티 때 입을 수트 걸어놓고, 현관홀을 가로지르면 나오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 3층이 회장님 침실이에요. 서류는 자기 전에 보시니까 침실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요. 다른 거에 관심 갖지 말고 그것만 두고 곧장 빠져 나와요.



"……."



 레이첼 아무래도 전 안 되는 건가 봐요. 6인가족이 살아도 남을만한 수의 문이 1층에 있었다. 처음 방문한 지민이 초능력을 발휘하지 않고서야 옷방을 한번에 찾는 것은 무리였다. 다 똑같은 디자인의 방문은 푯말도 없었으며, 미술관을 방불케 하듯 복도에 가득 걸려진 그림들은 오히려 지민을 미궁 속으로 빠뜨렸다. 여기 아까 들어갔다 나온 곳인데 이런 공간이 또 있었어? 왜 이 집은 점점 커지는 거지? 민윤기가 딱히 운동도 하지 않았는데 마른 이유를 알겠다. 이렇게 무식하게 큰 집에 살면 살이 안 빠질 리가 없잖아.

1 층을 뱅뱅 돌던 지민은 간신히 수없이 많은 옷이 걸린 옷방에 수트를 걸어놓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나는 성공했고. 나머지 하나도 얼른 처리하고 나가자. 오래 끌다 윤기를 만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지민은 조심스레 발뒤꿈치를 들고 카펫이 깔린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거기까진 그래도 지민의 혼자 힘으로 풀 수 있을 정도로 수월했다.



"…어…?"



 3층에 도착하고 지민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레이첼은 간단하게 침실 안 테이블이라고만 말했다. 하얀색 테이블인지, 꽃이 놓인 테이블인지, 아니면 침대 머리맡에 놓인 테이블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망할. 지민은 거대한 운동장 같은 침실의 한 가운데서 울상을 지었다. 레이첼 침실이 이렇게 크다고는 얘기 안 해주셨잖아요.



"여기다…아니야. 여긴 아닌 거 같아."



 고민하던 지민은 하얀색 테이블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명장이 손수 윤기의 이름을 박아 만들었다던,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테이블은 너무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너무 눈에 안 띄잖아. 다시 전화해서 가져오라고 할 수도 있어. 서류를 소중히 끌어안고 꽃이 놓인 테이블로 간 지민은 그 앞에서도 망설였다. 여긴 침대랑 너무 먼데. 결국 침대 테이블로 다가가서도 망설이다 세 테이블을 왔다갔다하며 뱅뱅 돌았다.

 그냥 아무데다 놔도 괜찮지 않을까? 헥헥거리며 방황한 지민은 침대 옆 작은 협탁과 비슷한 모양의 테이블을 선택했다. 이런다고 휴가를 다시 무르진 않을 거야. 합리화하며 막 나가려는 때였다. 협탁 위 엎어진 액자를 발견했다.



"설마 내가 아까 엎어뜨린 건가."



 정신 없이 돌아다니다 치는 바람에 엎어졌을 수도 있다. 식겁하며 지민은 냉큼 작은 액자를 똑바로 세웠다.



"어…."



 하트만 가의 가족사진이었다. 낯익은 얼굴이다. 정정했을 시절의 로빈츠 하트만과 그의 아내, 그리고 딸이 있었다. 그 속에는 청소년기로 보이는 어린 윤기도 있었다. 열여섯이나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인다. 모두 활짝 웃고 있으며, 특히 로빈츠 하트만의 딸이 분명한 금발의 어린 소녀가 윤기와 손을 잡고 예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어린 윤기는 어색하게 웃고 있지만, 확실히 비웃음만 머금는 지금에 비하면 순한 웃음이었다. 이때는 꽤…행복해 보이네. 지민은 저도 모르게 액자를 들고 두 손에 꽉 차는 사이즈의 액자를 가만 들여다보았다.


 어거스트의 전 수장 로빈츠 하트만이 죽었을 당시 세상은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예고된 죽음이었다. 지민은 밤새며 과제를 하다 속보로 들려오는 뉴스 타이틀을 보고 알았다. 하품하며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이다 그렇구나 하고 화장실로 들어갔었다. 당시 로빈츠 하트만은 침대에 누워 호스를 연결해 간신히 생명을 연장하다 죽은 것으로 기억한다.

 하트만 가의 비극은 지난번 윤기를 검색했을 때도 나왔으며, 지민도 수년 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애지중지 키운 하나뿐인 딸이 원인 모를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실이 전파를 탔고, 세상은 그 순간이 하트만 가의 비극의 시작이라 불렀다. 로빈츠 하트만의 부인인 페트리아 하트만은 충격으로 병상에 누워 1년뒤에 세상을 떠났으며, 로빈츠 하트만이 심장을 토해낼 만큼 거세게 오열하는 모습을 담은 파파라치의 사진이 인터넷을 떠돌았다.



"……."



 무언가 보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본 느낌이었다. 뉴스로 접하던 소식의 잔재를 당사자의 침실 안에서 마주한 건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거스트를 군림하는 까칠한 회장에게 손바닥만한 고작 가족사진 단 한 장만이 남아있다는 걸 그 누가 예측이나 할까.


 윤기가 어떤 식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을 극복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묵직하게 심장이 눌려왔다. 위로의 말은 들었을까. 괜찮다 걱정해주는 말은 들었을까. 이상한 일이다. 툭하면 타블로이드 1면을 장식하고, 누구든 차지하고 싶어 안달 내는 옆자리를 가진 남자의 주변에는 정작 약을 가져다 줄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돈이 없어 고생하며 가족과 떨어진 자신에게도 고모할머니가 곁에 있었고, 지금은 정국이 곁에 있는데 민윤기의 곁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민은 확신했다. 민윤기는 외롭다. 외면하려 했는데, 증거들이 너무 많았다. 외롭잖아. 아닌 척하면서도 외로운 거잖아. 안타까운 한 편으로는 너무나도 윤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일부러 못된 말만 부러 골라하며 상처 주는 건지 지민의 상식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외로워서 더 예쁨 받으려고 노력했는데. 밉보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사랑을 퍼주며 그것으로 외로움을 대신 채웠다. 똑같이 외로웠음에도 민윤기는 자신과 정 반대였다.



"아아…박지민 정신 차리자…이럴 때가 아니야…."



 지민은 테이블 위에 액자를 세워놓고는 애써 윤기에게 느껴지는 측은함을 내쫓기 위해 볼을 찹찹 두드렸다. 그러다 서류를 위에 두는 게 마음에 걸려 테이블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비어있을 줄 알았던 서랍 안은 하얀 종이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종이들이었다.



"뭐야. 내 감상문들이 왜 여기 있어."



 황당해하며 지민은 감상문 뭉치를 꺼냈다. 어바웃 타임, 유주얼 서스펙트, 레미제라블, 미드나잇 인 파리. 영화이름이 박힌 감상문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처음으로 제출했던 감상문까지 맨 밑바닥에 있었다. 버린 줄 알았는데. 윤기는 무언가를 스스로 챙기지 않는다. 허드렛일은 비서들의 몫이었고, 심지어 다 본 서류는 바닥에 팩팩 던져버렸다. 매일 아침 땅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 정리하는 것이 지민의 임무 중 하나였다. 지민은 당연히 그 속에 제 감상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여기 사이에? 손을 뻗어 오늘 놓고 가기로 되어있는 서류더미를 확인하려는 참이었다. 벨소리가 울렸다.



"악!"



 현장을 적발된 도둑처럼 놀란 지민이 퍼덕거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쓰읍. 지민은 아픈 엉덩이를 주무르며 냉큼 발신자를 확인했다. 전정국. 얘는 항상 이럴 때 건다니까. 다소 퉁명스럽게 받았다.



"왜."

[왜긴요. 내일 몇 시에 만날지 정해야죠.]

"아 맞다…형이 지금은 좀 그렇고 좀 있다 집에 도착해서 다시 전화할게."



 지민은 열려있는 서랍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 못했어요?]

"이제 곧 할 거야. 끊는다."



 전화를 끊은 지민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집을 떠났다. 그래도 전화를 건 주인이 윤기가 아니라 다행이다. 만약 윤기였다면 참지 못하고 동정했을 것이다. 지민은 싱숭생숭한 가슴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잡았다.








***









 연말 시기 주말 영화관은 붐볐다. 팔짱을 끼고 나온 연인이 수두룩했다. 가볍게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매진이었고, 오늘 개봉한 헐리우드 액션 영화는 당연하게도 남은 좌석이 없었다. 티켓이 남은 영화는 지루하다는 평이 일색인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액션영화를 좋아하는 정국은 이 영화를 보는 대신 소극장을 가자 했지만, 지민은 부득불 영화를 봐야 한다 주장했다.



"돈 내가 냈잖아. 영화 보자."

"내가 낼게요. 다른 거 해요."

"싫어. 내가 내기로 했잖아. 잊었어? 내가 다 산다고 한 거. 그거 네가 말한 거다?"

"그럼 그거 취소할래요."

"아니 내가 낼 거라니까. 보자. 응?"



 정국은 말싸움하기 귀찮다는 듯 두 손을 들고 항복 표시를 했다. 보기 싫다는 생각이 만면한 얼굴을 하고서 지민을 따라 예매한 좌석에 앉았다. 광고를 내보내고 있는 화면이 끝나고 어두워지자 한 마디만 툭 남겼다.



"끝나면 깨워요."



 미안하다…. 내가 밥은 맛있는 걸로 살게. 너한테 솔직하게 감상문 써야해서 보는 거라고 말했으면 안 볼 거잖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 정국에게 사과를 보낸 지민은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는 지민의 취향을 한참이나 빗겨간 내용이었다. 상영하는 내내 사람들은 하품일색이었으며 어린아이들마저 재미없는지 곳곳에서 칭얼거렸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이 밝아졌을 때, 지민은 감기려는 눈꺼풀을 꿋꿋이 참아낸 스스로를 대견하다 해주고 싶었다. 내가 만들어도 이거보단 재미있을 텐데. 감상문은 이딴 식으로만 안 만들면 성공할 거라고 쓰면 되겠네. 정국을 흔들어 깨우자 정국이 부스스 눈을 뜨며 기지개를 켰다.



"으음…끝났어?"

"응."

"어땠어?"

"뭐…나름 재미있었어. 귀여웠어."

"그래? 예상 밖이네."



 정국이 머리를 한 손으로 털며 뻐근한 팔을 돌려 스트레칭했다. 지민은 차라리 정국이 자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을 영화를 포장하려니 영 입이 간질거렸다. 그러다 방금 대화에서 모자란 부분을 하나 지적했다.



"야…근데 너 말이 짧다?"

"아 반말했어요? 몰랐네. 잠이 덜 깼나 봐요."



 정국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흔들어 잠을 내쫓았다. 지민은 눈을 흘기며 너 나 무시하는 거지, 하고 옆구리를 툭 쳤다. 정국은 그마저도 성가시게 여기며 밥이나 빨리 먹으러 가자 지민을 재촉했다.




 식당은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다는, 특히 스테이크가 맛있다는 곳이었다. 어거스트에 취직 후 나름 괜찮아진 월급 사정으로 이 정도까진 살 수 있었다. 지민은 스테이크 두 덩이와 와인을 한잔 시키고 영화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냈다. 많이 먹고 많이 커라, 우리 정국이. 이미 많이 크지만.



"요즘 그 싸이코랑은 어때요?"



 레스토랑에서 만난 이후 정국이 윤기를 지칭하는 칭호는 싸이코였다. 지민은 윤기 이야기만 나오면 눈꼬리부터 빼족하게 만드는 정국을 알아 되도록이면 이야기를 피했다. 물어보는 거 보니 화가 좀 풀렸나. 괜찮다 판단한 지민은 환하게 웃으며 최근 벌어지는 놀라운 일을 들떠 전했다.



"요즘 민윤기가 나 이름으로 불러준다. 엄청나지 않아? 박지민 막 이렇게 부른다니까? 그거 때문에 늦게 간다고 안 혼나. 너무 좋아."

"하 그럼 그 동안은 뭐라고 불렀는데요? 애칭은 아닐 거고."



 정국이 기가 찬 듯 물을 마시며 어이없어했다. 이름 불러준다고 좋아하는 판이라니. 지민의 근무환경이 얼마나 최악인지 알만하다. 사람은 원래 이름으로 부르는 거예요. 당연한 사실을 알려주자 지민은 깨달음을 얻은 듯 아, 했다.



"어…그러네. 사람한텐 원래 이름으로 부르지."



 지민은 새삼 인간이 엄청난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조금만 더 레이첼로 불렸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 칸에 레이첼이라 적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취직한 첫 직장은 왜 이 모양이지. 지민은 역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건 자신이라 다시 한번 되새겼다. 정국은 나온 스테이크를 자르며 새 화제를 꺼냈다.



"형 근데 그때 내가 말한 거 기억하고 있어요? 할말 있다고 했던 거. 싸이코 만난 날."

"아 그거. 맞아 그거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뭔데 그래."



 지민은 팬에 올려진 토마토를 포크로 찍으며 궁금한 눈을 했다. 진짜 결혼이라도 하는 줄 알았었는데. 정국은 자른 고기를 입에 넣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오늘 날씨가 맑네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나 한국가요."

"컥!"



 토마토가 목구멍에 턱 걸린다. 지민은 가슴팍을 두들기며 막혀오는 목을 물로 넘겼다.



"한, 켁, 국이, 윽."

"물 마시고 말해요."

"고마워…근데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한국이라니. 학교는?"

"졸업하고 가요. 아마 졸업하고 짐 정리하면 6월말즘에나 가겠네요."



 정국이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지민은 자르던 것도 잊고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한번도 정국이 자신보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간다 생각해 본적은 없다. 너무 갑작스럽다. 놀란 지민은 말을 찾지 못하다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내놨다.



"…진짜 충격적인 소식은 충격적인 소식이네."

"뭘 그렇게까지 놀라요."

"난 네가 이렇게 바로 갈 줄은 몰라서…."



 어렸을 때 한국에서 떠날 때 기분과 엇비슷하다. 본격적으로 떠난 것도 아니고, 소식만 들은 것뿐인데 마음 속에서 벌써 찬바람이 숭숭 분다. 새삼 다시 느낀다. 내가 정국이한테 의지를 많이 하긴 많이 했구나.



"내가 얘기했었잖아요. 부모님 한국에 계시다고."

"그렇긴 한데…."



 지민은 가만 생각해보니 자신이 정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외동아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 무리 없이 유학을 와 생활할 정도면 나름 잘 사는 집인가 보다 추측만했다. 정국은 몇 번 정도 자신의 부모님과 통화했지만, 지민은 한번도 정국에게 전화로도 소개받은 적이 없다. 한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 사실이 지금은 서운하게 다가왔다.



"가서 뭐해…?"

"할 일이 좀 있어요. 회사 관련으로요."

"그래서 네가 취업을 안 했었구나. 그러네…그랬구나…한국으로 떠나는 구나…."



 너 가는 걸 내가 붙잡을 수는 없지. 이제 많이 못 보겠네. 아쉽다. 난 이제 누구랑 밥 먹고 놀지. 지민이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내고 앉아있자니 정국이 한숨 가득히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형이 이럴 거 같아서 날 잡고 이야기하려고 했던 건데. 뭘 벌써 그렇게 서운해하고 그래요. 이런 반응이면 다른 거 더 못 말하잖아요. 어깨 펴요.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 없어요?"



 지민이 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나 친구 너밖에 없는데."



 지민은 너무 솔직하다 싶을 정도로 순순히 인정했다. 이 커다란 뉴욕에서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건 정국밖에 없다. 스테이크를 쿡쿡 찌르며 지민이 푸념했다. 아아 난 이제 누구랑 민윤기한테서 받는 스트레스 풀지? 일순 할말이 없어진 정국은 혼자 땅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하는 지민을 건져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다음에 더 하고 여행이나 가요 우리. 휴가 받았다면서요. 나 쉬는 거 겹치는 거랑 딱이네. 졸업여행 좋잖아요."

"응…아 이게 너랑 마지막으로 가는 여행인가…?"



 지민이 손주를 기억하는 백발이 희끗한 노인마냥 아련하게 말했다. 이별여행 같다, 이거. 흑흑 우는 시늉까지 해 보이는 지민을 정국은 쯧쯧 혀를 차며 바라봤다.



"형이 왜 친구 없는지 알겠네요."

"야!"

"밥 먹어요. 다 식네."



 지민은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사진이라도 많이 찍자며 계획을 늘어놨다. 웃고 있으면서도 속은 조금 쓰렸다. 이별은 역시 좋아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