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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Caro Emerald - One Day>










 요 근래 지민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솔로로 돌아온 완벽한 짝사랑 연하남 전정국을 어떻게 꼬셔야할지도 고민이지만, 아무래도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집 한 채를 호가하는 외제차를 부숴먹었고, 심지어 그 주인에게 성질을 부리고 돌아왔다.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빌리지? 장기를 떼어야하나? 은행은 이미 전세금 대출이자가 쌓여있는데…. 지민은 아스라이 제 4의 금융권, 제 5의 금융권을 떠올려보았다. 하하 그래 해봤자 신체포기각서밖에 더 쓰겠어. 괜찮아 지민아. 어떻게든 되겠지. 사라지는 콩팥, 각막 등 각종 내장부위를 생각하며 지민은 사실상 생각을 포기했다. 견적서가 나온 다음부터 수명이 줄어들도록 생각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카페에서 한 차례 언쟁이 오간 후 곧장 2억이 찍혀 날라올 것만 같던 견적서는 일주일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다. 지민은 의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벤츠로 저장해놓은 윤기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제발 이대로 까먹어주면 소원이 없겠는데. 벤츠의 기억력 감퇴를 염원하며 하루하루 일개미처럼 산 그때, 호석으로부터 새로운 클라이언트의 자료를 받았다. 호석은 금덩이라도 맡기는 것마냥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이번에 진짜 중요해.”

“누군데요?”

“명택이야. 명택물산 전무인데, 명택그룹 민회장 막내라고 하더라고.”

“아 거기요? 지난번에 진짜 마음에 드셨나보네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 명택그룹은 지민과 인연이 깊었다. 명택그룹 민회장의 장남 신혼집을 세렌디피티에서 담당하면서부터 세렌디피티의 인지도는 수직으로 상승했다. 명택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입소문을 탔다. 이를테면 연예인 누구누구가 어디 아파트에 산다더라, 하는 소문이 먹힌 것과 비슷한 효과였다. 호석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손님이었고, 지민에게도 마찬가지로 고마운 고객이었다. 물론 인테리어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솥가마와 한국 기와 장인을 찾는 건 좀 힘들었지만.



“잘할 수 있지?”

“물론이죠! 걱정마세요.”



 지민은 호석을 향해 눈을 활짝 휘었다. 믿으세요 사장님!







 새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장소는 명택물산 본사 빌딩이었다. 세렌디피티의 경영철학이란 ‘고객이 원하는 건 뭐든지!’였으니 매번 미팅장소도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변했다. 여기까지 지민은 의아한 상황을 느끼지 못했다. 종종 시간이 부족한 상류층 인사들은 직접 본인들의 사무실로 초대를 하곤 했으니까. 지민은 미리 연락을 주고받은 명택물산 전무의 비서 강대혁을 찾았다. 강비서는 사람 좋은 목소리로 약속을 정했다. 전무님이 조금 바쁘셔서요. 회사건물 로비에 도착해서 연락주시면 제가 내려가도록 할게요.


 지민은 강비서에게 도착했다는 연락을 남기고 로비를 구경했다. 적자라 유명한 명택물산도 로비 하나만큼은 여느 회사와 마찬가지라 번쩍번쩍 빛났다. 점심시간인지 수트 군단이 빠르게 로비를 지나다녔다. 언제 내려오시나. 여기저기 심심하게 구경하던 지민은 문득 수트 안주머니에서 진동을 느꼈다.



[형 다음 주에 시간 괜찮아요?]



 발신인은 전정국이었다. 순식간에 지민의 표정이 갓 쪄낸 떡처럼 말랑하게 풀렸다. 니가 원하면 내일도 돼…. 지민이 빠르게 답장을 마치며 폰을 들여다보는 사이, 누군가 다가와 지민에게 말을 붙였다.



“혹시 지민씨?”

“네!”

“안녕하세요, 명택물산 전무님 수행원 강대혁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그럼요! 시간은 금이잖아요.”



 맞는 말씀이세요. 강비서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는 지민에게 마주 웃어 보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손을 뻗어 안내했다.



“올라가실까요? 전무님 곧 돌아오실 거예요.”



 지민은 강비서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세렌디피티에서 예약은 강비서의 정보로 등록되어있었다. 명택물산 전무라면 명택그룹 막내인데. 상류층을 자주 접하는 직업을 가진 지민도 명택그룹 막내에게 사생아설이 붙어있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번 작업도 괜찮을 듯 싶다. 같은 집안에서 자랐으니 성격이 명택그룹 장남과 같다면 수월하게 풀릴 터였다. 젠틀한 성격의 장남은 요구사항이 까다롭긴 했지만, 패악을 부리며 시간을 재촉하진 않았다. 지민이 살그머니 입을 열었다.



“전무님이 많이 바쁘신가 봐요. 최근에 저도 명택파크 관련한 뉴스는 종종 보긴 했는데….”

“아 네, 요즘 그 건으로 많이 바쁘시죠.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세요. 예전보다 미간에 주름이 진 날이 많으세요.”



 강비서는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아…뉴스에서 많이 복잡해보이긴 하던데 일이 많이 힘드신가 보네요…. 지민은 속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업무 난이도가 한 단계 상승했다. 강비서는 굳이 지민이 묻지 않아도 술술 떠들었다. 전무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히 높아 보였다.



“회장님이랑 최근 약속도 많아지셨어요. 불려가시고 돌아오시면 늘 피곤한 표정이세요. 없는 걸 만들어서 어떻게 가져가냐는 말씀도 하시고…. 그렇게 돌아오면 또 서류만 들여다보시는데 편히 쉬신 날이 언젠지 제가 다 가물가물할 정도네요. 전무님만이 이 명택물산의 미래인데 말이에요.”



 지민은 어쩐지 발을 잘못 내딛었다는 불안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기분이 저조한 고객 중 멀쩡한 요구를 한 고객을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세렌디피티의 수석 디자이너답게 스스로 세뇌를 시작했다. 괜찮아. 어차피 그래도 한 달이면 끝나잖아. 더불어 지민은 저번 주 등에 쌓인 빚더미를 떠올렸다.


 띵, 벨이 울리고 강비서는 지민을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안에 들어가계시면 곧 전무님께서 들어오실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지민은 조심스럽게 가죽쇼파에 앉아 전무의 개인사무실을 훑어보았다. 워낙 들어가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사치품으로 기를 짓누르는 상류층 집안을 많이 드나들다보니 사무실은 그리 지민에게 대단해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개인사무실은 깔끔한 편이었다. 그림 하나 걸려있지 않았고, 있어봐야 쇼파와 벽면을 빼곡이 채운 서재가 고작이었다. 이런 취향이라면 인테리어 요구도 그리 까다로울 것 같진 않다. 괜히 쫄았네. 하나하나 섬세하게 둘러보고 있는 찰나, 지민의 시야에 명패가 잡혔다.



 전무이사 민윤기.



“…….”



 처음 본 저 이름이 왜이렇게 익숙할까? 지민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민했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안타깝게도 불과 일주일 전 딱 한 번 들은 이름은 지민의 기억에서 가물가물하게 잊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 자리에서 지민이 얻어온 기억이라곤 개념 없던 벤츠의 계약연애 제안과 사기였다.


 지민은 본격적으로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대기업인 명택그룹 막내아들과 박지민이 개인적으로 엮일 확률은 지극히 0에 가깝다. 그런데 무시하자니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도무지 기억은 안 나는데 영 찝찝했다. 뭐지. 뭘까. 민윤기, 민윤기? 민윤기…. 중얼거리던 지민은 어쩐지 점점 이름을 입에 올릴수록 등골이 저릿저릿거려 왔다. 그래 이 느낌은 뭔가 엄청 불길하고 쎄하고 꺼림직하고 꿉꿉하고 안 좋은….


 그때였다. 지민이 들어왔던 문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조금 늦었습니다.”



 목소리는 가려진 기억을 단번에 끄집어내는 하나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지민은 척추 아래뼈와 갈비뼈가 뒤바뀌는 것만 같은 놀라운 기분을 경험했다. 지민의 손에서 펜이 뚝 떨어졌다. 명패를 바라보던 지민의 고개가 삐걱삐걱 문 쪽으로 돌아갔고, 그쪽에는 세련된 수트를 입은 벤츠, 그러니까 윤기가 매너 좋아 보이는 웃음을 머금고 서있었다. 그쪽이 왜 거기서…? 지민은 눈을 의심했다. 너무 놀라 굳어버려 탄식조차 할 수 없었다.



“또 뵐 줄은 몰랐네요.”

“…….”

“우연인가요?”



 이게 우연이라면 인생은 과연 얼마나 많은 우연으로 채워져 있을까? 내가 손수 차로 뒤에서 박아 이마를 터뜨린 사람을 중요한 고객으로 다시 만날 확률은. 욕을 시원하게 날려주고 다신 보지 말자며 헤어진 사람이 명택그룹의 막내아들일 확률은. 윤기는 지민이 넋이 빠져있건 말건 매끄러운 동작으로 의자에 앉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때는 집에 잘 돌아가셨는지 모르겠군요.”



 망…했다….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 지민은 윤기가 내미는 손을 멍청하게 바라만 보았다. 실화인가? 꿈이 아니야? 이게 현실이라고?



“손이 좀 민망한데.”

“…네? 아, 아….”



 홀린 듯 윤기와 악수하며 지민은 현실을 인지했다. 시발, 실화다.


 지민은 직감했다. 박지민 인생에서 긁어모은 불행은 고작 외제차 2억으로 끝이 아니었다. 회생불가. 이건 회생불가다. 최고의 경보대피령이 울려 자리를 피하라는 생각만 사고회로를 타고 뱅뱅 돌았다. 지민은 급격히 이 민망하며 어이없는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아직 늦지 않았다. 당신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며 이제라도 다른 직원을 붙여줄 테니 쏜살같이 도망갈 기회로는 충분했다.


 그 순간 지민은 호석이 아른아른 떠올랐다. 지민아 진짜 중요해. 맡긴다, 알지? 믿는다며 어깨를 팡팡 두들겨준 호석의 신뢰를 또 부수는 건데. 잘려도 할 말이 없다. 지민은 다시금 호석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커밍아웃 이후 집에서 쫓겨난 박지민을 도와준 인생일대의 은인이 바로 정호석이었다. 나만 믿으라며 머리가 깨져도 일은 잘 해오겠다고 다짐한 게 엊그제였다. 지민은 침을 꼴딱 삼켰다. 그리고 다시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는 윤기를 마주한 순간.



“…….”

“…….”



 형 근데 이건 내가 커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나도 이 사람을 치고 싶어서 친 건 아니었어. 이왕 칠거면 성격 좋은 사람으로 쳤지. 아니 그 전에 사람을 안 쳤을 텐데. 지민의 머릿속에는 또 호석의 선한 눈동자가 동동 떠다녔다. 결국 착한 동생 박지민이 명택물산 전무의 개인사무실에서 튀어나가는 일은 발생하지 못했다.


 지민은 어색하게 최선을 다해 하하, 웃었다. 입꼬리에 경련이 이는 것 같다.



“조금 놀랐네요. 윤기씨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저도 놀랐습니다. 지민씨랑 또 만나게 될 줄은요.”

“아하하…사람 인연이란 신기하네요….”



 윤기는 안절부절 못하는 지민을 빤히 지켜보았다. 지민은 가능한 차분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일단 차로 친 건 제 잘못이구요. 견적서는 주시면 돈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제가 약간 흥분했던 거 같구요….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리겠습니다….”



 전혀 미안하지 않지만 미안해 보이는 얼굴로 지민은 사과했다. 비통하게도 현실사회에서 돈이 많은 사람이 강자였다.



“혹 원하시면 다른 디자이너 분으로 변경 해드리겠습니다.”



 난 망했어. 호석이 형 미안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지민은 차근차근 호석으로부터 세뇌당한 세렌디피티 철학을 주절주절 외웠다. 익히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세렌디피티는 엄격한 입사조건을 가지고 있고, 작업물 퀄리티에 대한 걱정은 덜어놓으셔도 됩니다. 또한 세렌디피티는 고객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업으로써….



“아 그럴 필요는 없어요.”

“…네?”

“지민씨가 담당해주세요.”



 절로 아래를 쳐다보던 지민이 고개를 번쩍 처들었다.



“뭐 단어를 잘못 선택한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사적인건 사적인 거고 이건 일이지 않습니까? 굳이 감정을 개입해서 진행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윤기는 말끔한 얼굴로 술술 말했다. 어디 유명 사회잡지 인터뷰에서 나온 모범답안이라도 훔쳐온 것만 같았다. 지민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요?”

“네.”



 …뭐지? 지민은 클라이언트라는 사실도 잊고 윤기를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마를 터뜨리는 사람을 태워죽이고 싶은 눈은 아니었다.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유능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기본적으로 호석이 좋아하는 신뢰감 가는 사람의 표본이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지민씨가 싫을 수 있겠네요. 제가 그때 지민씨 기분을 더럽게 만들어서….”

“네, 네? 아니요! 하하 설마요. 다 잊었죠!”



 지민이 황급히 팔을 내둘렀다. 그 카페를 나서는 순간 모두 잊었어요! 오늘 처음 만난 사이나 마찬가지죠. 지민은 기회를 잡기로 했다. 찝찝해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 뿐이었다. 생각보다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때는 급해서 인성이 폭발했던 거고 지금은 괜찮을 거야. 윤기를 좋은 사람으로 애써 포장한 지민은 분위기를 환기하듯 방긋 웃으며 노트와 가져왔던 서류파일을 촤르륵 펼쳤다.



“이사하는 목적이 있으세요? 주거나 아니면 다른 사무실이라던가.”

“주거용입니다.”

“최근 이사한지 얼마 안됐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주거용, 또박또박 적던 지민은 대답이 없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미약하게 일그러지는 윤기의 미간을 목격했다.



“어 그혹시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으신 거라면….”

“아 그건 아닙니다. 최근 불법침입을 당해서요. 커다란 이유는 없습니다.”

“부, 불법침입이요?”



 명택그룹 막내아들 집을 어떤 간 큰 도둑이. 윤기가 살던 오피스텔은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했다. 윤기는 곧 불쾌하다는 얼굴을 집어넣고 대답했다.



“굳이 인테리어와는 관련 없는 사항입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아 네. 마찬가지로 혼자 사시는 건가요?”

“예. 요즘에는 옛날 기와집, 옛것들이 좋더군요.”

“아아 좋은 선택이세요. 요즘에는 그게 또 인기죠.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일까요?”

“고려시대 집들처럼 소소하면서도 단아하고 세련된 멋이 있는 집을 원합니다.”

“아! 형님과 같은 취향이시군요.”

“아뇨. 형님은 조선시대고, 저는 고려시대.”

“…네?”



 현대인이 집 꾸미는데 조선시대랑 고려시대랑 뭔 차이지? 지민은 약간 당황했으나 곧 아는 척 아아, 했다. 일단 평소 습관대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고려시대랑 조선시대는 다르죠. 문화 풍습 자체가 다르니까요.”

“도자기도 몇 개 디피했으면 하는데요. 진품으로요.”

“아…그게 꼭 고려시대로요?”

“네. 꼭, 진품이요.”



 진품. 윤기가 강조했다. 진품이면…얼마나 전국을 뒤져야 되는 거지? 일반 인테리어 업체가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는 다루지 않지만, 지민이 다니는 곳은 고객이 원하는 건 뭐든 구해다주는 세렌디피티였다. 청자, 백자 여러 가지를 떠올리던 지민은 윤기 몰래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도 빠른 건지 윤기가 틈도 주지 않고 물었다.



“왜요, 못합니까?”

“설마 그럴 리가요! 무조건! 세렌디피티는 원하는 대로 전부! 들어드린답니다. 걱정마세요!”



 걱정은 내일 날씨정도 하시면 돼요. 지민이 환하게 웃었다. 윤기는 영혼이 담겨있지 않은 인사치레의 감탄사와 함께 말했다.



“원하는 대로 전부요?”

“그럼요.”

“그거 참 믿음직스럽네요.”



 그때 이상하게도 지민의 머릿속에 탑재된 사이렌이 웽웽 울렸다. 아까처럼 쎄하고 찝찝한 이 기분은…. 그 후 지민은 프로정신을 살려 몇 가지 전체적인 인테리어 관련 질문을 던졌고, 윤기는 성의 있게 대답해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계를 확인한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오늘은 급한 회의가 있어서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자세한 상황은 전화로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자리에서 일어나며 윤기가 씨익 웃었다.



“제 집, 잘 부탁드립니다.”



 지민은 마지막으로 웃는 윤기의 미소가 어쩐지 사악해 보인다고 생각했으나, 곧 생각을 철회시켰다. 아냐 착각이겠지. 괜찮은 사람이야. 그럼그럼. 지민이 영업용 미소를 뿌리며 마찬가지로 인사했다.



“네, 언제든 전화 편하게 해주세요.”








***








 지민은 명택물산 빌딩에서 내려오자마자 앞범퍼가 덜렁거리는 중형차에 올라탔다. 클라이언트와의 첫미팅이 끝나면 호석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이번에도 호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민아! 끝났어? 어땠어?]

“네, 괜찮았어요. 잘 진행될 거 같아요.”

[이야, 우리 지민이. 이 형은 너 믿고 있었다.]

“아 근데요, 형님 있잖아요.”



 지민이 머뭇거렸다. 그 클라이언트 이마를 제가 한번 터뜨렸었는데요. 그리고 개소리를 도저히 못 들어주겠어서 서류도 얼굴에 뿌리고 욕은, 음, 욕은 밖에서 해서 못 봤을 거 같긴 한데요. 고객 쪽에서 다시 잘해보자고는 하는데. 솔직하게 털어놓으려던 지민은 굳이 호석에게 이런 복잡한 사전설명을 할 필요 없단 판단을 내렸다. 괜찮아. 착한 사람일거야. 사과도 하고, 일도 맡겨주고, 그때랑 달리 말투도 매너있었잖아. 깔끔하게 잊고 다시 하는 거지 뭐. 결말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다.



[응? 뭐가 있는데?]

“아니에요. 에이 그러니까 형님 나만 믿으라고 했잖아요.”



 지민은 애교 있게 대답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곧 다시 들어갈게요.”

[엉, 빨리 와라. 형이 맛난 거 사줄게.]

“에이 형님,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맛난 거는 뭘요. 그래서 저는 피자가 좋습니다.”



 호석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오냐. 전화를 끊은 지민은 차를 출발시켰다. 열심히 하자. 혹시 알아. 집을 너무 마음에 들게 만들어주면 견적서도 깎아줄지.


 그러나 그때 문을 박차고 튀어나왔어야 했다고 지민이 후회하기까진 약 3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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