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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이루리 - 깝>









 세렌디피티의 내부디자인은 독특했다. 하얀색과 노란색을 절묘하게 조합해놓은 벽지는 포근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의 결정체였고, 감각적인 소품들은 어디서 구한건지 그 모양새가 전부 독특했다. 휘어진 달 모양의 시계, 투명한 책상, 종류별로 다 모아놓은 선인장. 세렌디피티는 건물 자체만으로도 ‘실내인테리어의 정석!’ 잡지 코너에 실렸지만, 그중에서도 세렌디피티의 창업자, 사장 호석의 방은 특별했다. 온통 주황색으로 뒤덮인 그곳은 작은 모형큐브 같았다. 그 예쁘고 아담하며 포근한 방을 사원들은 시간과 정신의 방이라 불렀다.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그 방에 입장한 지민은 시간이 느려지고, 정신이 천 갈래로 쪼개지는 기현상을 체험하고 있었다.



“지민씨 이렇게 하면 상당히 곤란해요.”



 우리는 공동체잖아요. 호석은 무려 삼십분이 넘는 시간동안 지민을 붙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잘하면 되잖아요? 내가 못하는 부탁을 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감정적 또는 이성적으로 빙빙 도는 말을 듣다보면 정신이 멀어지기 마련이었다. 네, 네 사장님. 끈 달린 인형처럼 끄덕거리는 지민을 보면서 호석이 흠, 했다.



“지민씨 듣고 있어요?”

“네, 그럼요.”

“내일부로 그만 둬요. 퇴직금은 없어요.”

“네, 알겠습…네?”



 지민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그, 그만두라구요? 호석은 푹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거 봐 너 안 듣고 있었잖아.”

“어, 그, 어…죄송한데요…그 사장님….”



 두 손을 모으고 있던 지민은 눈동자를 빙글빙글 굴렸다.



“농담이야.”

“아 혀엉 심장 떨어질 뻔 했잖아.”



 지민은 심장이 떨어졌다는 가슴팍을 부여잡는 시늉을 하며 샐쭉하게 눈을 흘겼다. 나처럼 충직하게 일하는 직원이 어디있다구. 부리처럼 톡 튀어나온 입술은 불만을 표하는 펭귄 같았다. 호석이 버릇 고치는 사육사마냥 엄하게 일렀다.



“너 이번에만 넘어가주는 거야.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고. 그거 메꾸느라고 정현씨가 고생 진짜 많이 했어.”

“미안해.”

“다음부터는 신경 좀 쓰자. 그런데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랬냐?”

“어…그냥 쫌….”



 섹스하느라…. 지민은 호석이 자신을 때려죽이지 않을까 걱정하며 진실을 숨겼다. 한번 하고 문자 보내면 되겠지, 했던 결심은 정국이 놔주지 않는 탓에 두 번이 끝나 침대에 엎어지고서야 보낼 수 있었다. 그땐 이미 부재중전화 4통이 호석에게 와있었다. 지민은 변명하는 대신 신뢰감 듬뿍 얹은 미소를 비추며 말을 바꿨다.



“앞으로 잘할게! 실수 없어!”

“말은 잘해, 말은. 조만간 새로운 클라이언트랑 짝지어 줄 테니까 그거나 잘해.”

“형니임, 내가 형님을 진짜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요?”



 헤헤, 손으로 하트를 발사하며 지민은 눈웃음을 흩뿌렸다. 어이구 끼 떠는 거 봐라. 가서 일이나 해. 지민은 나가라 손을 휘젓는 호석에게 마지막까지 사랑고백을 낭송했다. 형 알라뷰 하트하트!


 지민은 정국이 원망스러웠다. 이 자식이 진짜 힘만 좋아서. 그러게 내가 한 번만 하고 그렇게 잠시만이라고 외쳤는데! 실연당했다던 정국은 정말 한 마리의 미친 투우같았다. 지민의 위로 올라타 침대에서 한판 구른 정국은 지치지도 않는지 지민을 벌떡 들고 일어나 자세를 바꿨다. 정국아, 잠깐만 나 연락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스가 퍼부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지민의 입안엔 이번만이라고 웅얼거리는 말 몇 마디와 호석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호석이 형 돈 많이 벌면 뜬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일 더 열심히 할게요. 지민은 이유도 묻지 않고 넘어가준 착한 호석의 은혜에 무한한 감사를 표했다. 화르르 의지를 불태우며 도면을 붙잡으려는 찰나, 지민은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놓은 폰에서 진동을 감지했다. 모든 사업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지민은 전화로 걸려오는 모든 연락에 민감해야만 했다. 귀하고 높으신 분들은 전화를 씹힌다는 사실 자체에 어마어마한 분노를 표했다. 언젠가 전화를 놓친 직원 중 한 명은 폭언을 들었다. 담당자를 당장 바꾸라거나, 아니면 이 회사를 밀어버리겠다거나.


 지민은 발신자의 번호를 확인했다. 아무 이름도 뜨지 않는 걸 보면 클라이언트나 업무관련 업체는 아닌 듯했다.



“여보세요?”

[오늘 차사고 당한 사람입니다.]

“아! 오늘 아침에!”

[네, 맞습니다.]

“다친 곳은 괜찮으세요? 병원은 가셨어요? 영수증은 저한테 주시면….”

[일단 만났으면 하는데요.]



 지민은 불변의 법칙을 다시금 체감했다. 역시 돈 많은 놈들은 재수가 없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지 할 말만 한다. 인성하고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면서도 목소리만큼은 친절하게 잠시만요, 하고 답했다. 스케줄러를 열어 비어있는 가장 가까운 날을 찾았다. 내일은 현장 가니까 안 되고, 모레는 컨펌 기다려야하고.



“3일 뒤 목요일 즈음 괜찮을 거 같아요.”

[그럼 그때 만납시다. 장소와 시간은 문자로 보내드리죠.]



 예의상 멘트가 낄 틈이 없는 전화는 길지 않았다. 이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정보조차 얻지 못한 지민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차로 치고 받은 사이에서 살갑기는 좀 그렇지. 그래도 저장은 할 필요가 있었다. 차 수리비며 보험이며 꽤나 복잡한 사항들이 얽히게 될 터였다. 잠시 고민하던 지민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름으로 남자를 저장했다. 벤츠.



“…….”



 왜 하필 벤츠냐. 세상에는 집값을 차로 끌고 다니는 또라이들이 많았다. 꽉꽉 막히는 서울도로에서 대체 스포츠카는 왜 끌고 다니는데? 여기가 캘리포니아야? 고속도로야? 그거 써볼 일이나 있냐. 박지민 이 운도 없는 새끼. 그 모델이 어떤 모델이었더라. 워낙 정신이 없었어서 얼핏 윤곽만 떠오른다. 뒷범퍼 일부분만이니까…부품이 한국에 있긴 하겠지? 제발 해외에서 직접 공수해오는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지민은 책상에 머리를 콩콩 박으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보험사에서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 보험비는 얼마나 오를까. 하필 블랙박스도 한 달 전 고장이 났다.


 마침 건너편에서 마감에 시달리던 다른 인테리어 노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민씨, 여기 견적서 초안 작업해놓은 거 있어요?”

“아 네, 마지막으로 검토해서 보내드릴게요. 잠시만요.”



 지민은 그 어느 날보다 열정적으로 의뢰주 견적서를 펼쳤다.






***






 약속은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졌다. 2시라는 애매한 약속시간과 만날 장소가 문자 한 장으로 날라온 게 고작이었다. 대망의 목요일. 지민은 인스타그램을 한번 휩쓸었다는 어느 세련된 카페 앞에 서있었다. 크레이프 케잌이 어찌나 맛있는지 일본에서도 건너와 한 박스씩 포장을 해간다고 한다. 후우, 지민은 긴 심호흡을 다지며 손에 들린 과일음료박스를 꼭 쥐었다. 으레 병문안을 가면 흔히들 하나씩 사가는 인사치레용 선물이었다.


 오늘 지민의 목표는 하나였다. 어마어마한 말빨과 동정심으로 최대한 합의비용을 줄이자. 조금이라도 동정심을 유발해보겠다고 어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잘하자, 지민아. 오늘 대화 하나에 몇 달일지 모를 네 월급이 걸려있어. 박지민 넌 할 수 있어! 비장함이 흘러넘치는 뒷모습으로 지민이 입성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카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몇 번 주변을 두리번거린 끝에 지민은 문자로 설명 받은 인상착의의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캐주얼수트에 푸른 넥타이. 흘끔거리며 확인한 지민은 쪼르르 테이블로 총총 달려갔다. 딱 맞게 핏된 수트를 입은 남자의 어깨를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안녕하세요 혹시 어제 사고 당하신…?”

“…그쪽이 박지민씨 되십니까?”

“아아 네! 제가 박지민이에요.”



 지민은 세상에서 제일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날렸다. 3일 만에 만나네요. 눈꼬리를 동그랗게 휘며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동시에 바쁘게 윤기를 스캔했다. 걸치고 있는 옷 중 무엇 하나 싼 게 없다. 지민이 흔히 만나온 고객들과 비슷한 차림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하얀 이마에 떡하니 붕대가 붙어있다는 점이었다.



“민윤기입니다.”

“별 건 아닌데 빈손으로 오기 좀 민망해서요. 고생 많이 하셨죠.”



 맞은 편 테이블에 엉덩이를 붙인 지민은 쥬스세트를 윤기 쪽으로 밀었다. 으레 들려올 뭐 이런 걸 다 사오셨어요, 감사히 마실게요 하는 예의상 멘트는 들려오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 움직이지 않는 윤기는 그저 잠깐 시선만 던졌다. 약 1초정도. 지민은 꿋꿋이 웃으며 말했다.



“많이 아프셨겠어요….”

“그렇게 많이 아프진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두 바늘이나 꿰맸고 항생제 약도 먹고, 마취도 했지만. 운전대를 잡아야 할 때마다 그날 박은 이마가 조금씩 아린 건 뭐 제 기분 탓이겠죠.”



 돌려서 엿 먹이는 건가? 지민은 눈만 끔뻑거렸다. 인성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한데…? 아 진짜 박아도 왜 하필 이런 사람을 박았을까. 그렇지만 차로 친 건 이쪽이고, 멀쩡히 운전하다 운전대에 이마를 들이박아 피를 본 건 민윤기였다. 지민은 할 말을 찾다 앵무새처럼 진짜 죄송해요, 하고 반복했다. 



“사과는 많이 하셨으니 더 하실 필요 없습니다. 본론으로 진행하죠.”

“아 네 그쵸, 본론. 이야기 해야죠.”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업무 시작이다. 지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윤기는 지민을 빤히 바라보더니 한참만에야 입을 뗐다.



“나이는 어떻게 되시나요?”

“네? 아 스물여섯입니다.”

“직업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네.”

“세렌디피티면, 전에 한 번 들어봤습니다.”

“아 네. 최근 인터넷에 기사가 나긴 했었어요. 아마 그걸 보신 거 같은데.”

“그렇군요. 반듯한 직업이 있네요. 집은?”

“지금은 독립해서 혼자….”



 꼬박꼬박 대답하던 지민은 이상한 기류감을 느꼈다. 원래 차 사고가 나면 호구조사를 당하는 건가? 꼭 인턴 시절 여러 회사를 돌아가며 봤던 면접 같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던 윤기는 지민이 말을 멈추자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혼자?”

“살고는 있는데….”



 너무 당연하게 쳐다봐서 마저 이어 말하고 말았다. 좋습니다. 말하며 윤기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더니 수트 재킷 안쪽에서 폰을 꺼내 지민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액정 안에는 사진이 있었다. 그날 사랑스러운 지민의 중형차가 박은 슈퍼카 한 대가.


 지민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모델은 몇 달 전 차를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고객의 콜렉션에 들어있던 거다.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은 모델이라 들여오는데 꽤 애를 먹었다고 했던가. 한정판이라 각 차마다 고유번호가 부여되어있다 했던가. 부품 모두 흔치 않은 제품이라 주문제조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민은 일순 생각했다. 파산 신청을 먼저 하고 올걸.


 마침내 지민은 차량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 순간 지민의 눈은 카페 어느 누구보다 크게 뜨였다.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지, 지, 진짜 이 상태였어요?”

“예.”



 지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식겁하며 사진을 확대했다. 처참하다는 말도 사치였다. 뒷범퍼의 상태는 곧장 폐차를 하러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매끈한 광택을 자랑하는 윗부분과 달리 까지고 달랑거리는 표지판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차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었을 거다.



“어어 도, 도로에서는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혹시 어디 가다 더….”

“지민씨도 보셨지 않습니까? 이마에서 피가 질질 흘러나오는데 가긴 어딜 갈까요. 현기증이 너무 심해서 곧장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저기…제 기억 상으로는….”

“제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거 같나요?”

“네?”



 지민은 사진에서 시선을 치우고 윤기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그 얼굴에 지민이 뒤늦게 페이스를 고쳐잡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요, 설마 그럴 리가요. 그런데 제가 그때 정신이 없긴 했지만 근데 제 기억에는요.



“요만큼! 고장이 났었던 거 같은데 하하….”



 지민은 새끼손톱을 보이며 강조했다. 꽤 박긴 했지만, 그런데 이건 좀. 민망하게 웃으면서 아주, 극소의 부분이 상처가 났다는 뜻을 어필했다. 사람으로 따지면 딱밤 정도 맞은 수준이었는데, 하하.



“정신없어서 지민씨가 착각을 하고 계신 거 같네요. 이 만큼입니다.”



 윤기가 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 정도면 진짜 파산이다. 회사에서 나오는 월급, 아니 연봉을 부어도 힘든 가격이 나올 터였다. 보험사에서 과연 이 만한 차량을 커버해줄까? 안타깝게도 지민이 들어놓은 보험은 이런 눈 돌아가게 비싼 차량용이 아니었다. 지민은 눈동자를 빙글빙글 굴렸다. 블랙박스를 고쳐놨어야 했는데. 돈도 많은 새끼가 사기를 칠 준 몰랐지. 후회하며 흘끔 윤기를 향해 비굴하게 웃어보였다.



“아니면 혹시 블랙박스 가지고 계시면 봐도 괜찮을까요? 제껀 고장이 나서….”

“유감이네요. 저도 그런데.”



 시발. 지민이 충격으로 굳어있는 사이, 윤기는 술술 말했다.



“비서에게 견적은 받아두라고 말해놨습니다. 엔지니어가 한국에 없는 부품이라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는 하더군요. 직접 주문제작을 하기 때문에 시간도 오래 걸릴 겁니다. 아버지가 특별히 선물로 주신 차량이라 신경을 많이 썼나봅니다.”



 분명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이럴 리가 없다. 도로에서 차 하나 박았다고 인생이 망하다니. 말도 안 된다. 신장이 얼마라고 했더라…. 신장이랑 각막 두 개랑 심장까지 하면. 타닥타닥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본 지민의 이성이 현실에서 멀어지고 있는 그 시점, 윤기는 얼이 빠져나간 지민의 얼굴을 보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풀린 동공이 힘없이 윤기를 바라보았다.



“물론 당연히 견적서와 병원비, 정신적 치료비까지 돈으로 받아야겠지만.”

“…….”

“다른 길을 박지민씨께 제시하려고 합니다.”

“…네?”



 지민은 떠내려가던 정신을 붙잡아왔다. 다른 길이요? 억 단위 돈쯤은 우습게 쓸 수 있는 상류층이 아닌 이상 솔깃 할 수 밖에 없을 터였다. 윤기는 옆자리 의자에 올려놓았던 서류봉투를 지민에게 내밀었다.



“꺼내서 읽어보시죠.”



 지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봉투를 열었다. 약 세장의 하얀 종이들이 주르륵 딸려왔다. 근로계약서.


 민윤기(이하 "고용주"라 함)과(와) (    )(이하 "근로자"라 함)은 다음과 같이 근로계약을 체결한다.


 얼핏보면 평범한 근로계약서였다. 근무기간 미정, 근무장소 불규칙. 여러 항목들이 줄줄 쓰여있었다. 지민은 윤기를 향해 설마, 하는 눈으로 말했다.



“이직을 권유하시는 건가요? 저는 세렌디피티를 단순히 일터로만 생각….”

“더 읽어보세요.”



 산업스파이가 되는 건 아닌가 걱정한 지민은 조금 짜증이 난 윤기의 표정에 입을 다시 닫았다. 기존의 평범한 근로계약서와 비슷한 그 종이의 반전은 업무내용에 있었다.


 업무내용: 근로자는 고용주와 사적인 시간을 보내며 식사 및 다양한 문화활동을 한다. 근로자는 고용주의 요구에 따라 모든 일정을 소화한다.


 업무내용 아래로도 많은 계약조건이 쓰여 있었다. 맹세컨대 지민이 태어나 처음 보는 종류의 일이었다. 마지막 줄만 이해했다.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고용주는 근로자의 모든 빚을 탕감하며 말끔히 잊는다. 근로자 역시 고용주와 모든 관계를 종료한다.



“…제가 조금 모르겠어서 그런데요. 이게 정말 말 그대로 밥 먹고 영화보고 그런 일인 건가요?”

“맞습니다.”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발생한 모든 비용을 고용주, 그러니까 민윤기씨가 내고요?”

“예.”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먹고 노는데 돈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였지만 진짜 먹고 노는데 돈이 들어온단다. 지민은 어렴풋 인터넷 뉴스에서 단절된 현대사회인의 고충을 보여주던 인터뷰를 떠올렸다. 혼자 살다보면 현대인들은 외롭고 폐쇄적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에스엔에스에 글을 올리거나 돈을 내고 밥 친구를 구하기도 하죠. 지민은 다음으로 윤기의 사회생활을 의심했다. 친구가 없나? 없을만 하긴 하다. 한탕 크게 뜯으려고 사기도 치고 개념도 조금 없어보이니까 없는 건 문제가 아닌데. 대체 이걸 왜 자기 이마 터뜨린 사람이랑?



“…저랑 밥을 드시고 싶으신 거예요? 밥은 그냥 지금도 사드릴 순 있는데…아니 이게 거지취급이 아니고요.”



 거대한 빚더미와 맛있는 식사약속. 어느 선택지가 유리한지 훤히 보이지만 덥석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이기엔 수상한 구석이 많았다. 대체 갑자기 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던 윤기는 다 비운 컵을 내려놓았다. 다리를 꼰 자세는 퍽 도도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연애하는 척을 해달라는 겁니다.”



 윤기가 풀어 설명한 순간, 그 많은 카페 테이블 중 가장 분위기가 서늘한 건 윤기와 지민의 테이블이었다. 윤기도 지민도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아무 말도 즉시 잇지 못했다. 지민은 슈퍼카의 덜렁거리는 번호판을 봤을 때보다 넋이 빠진 얼굴로 생각했다. 미친놈인가? 지민은 윤기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다, 가능성이 높은 추론을 입 밖으로 꺼냈다.



“…혹시 촬영하시는 건가요? 몰래카메라? 유투버세요?”

“밥 먹고 영화보고 말 그대로 연애하는 척 데이트코스 몇 개만 저와 같이 다녀주면 됩니다. 코스는 제 비서에게 부탁해놨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지민씨가 원하는 곳으로 바꿔도 되고, 상관없습니다. 시간은 서로 조율해서 하루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니, 저기요. 윤기씨.”

“사진 몇 장이 찍히긴 할 텐데 외부로 퍼지는 건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사용 후 바로 폐기하니 그에 관해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기….”

“계약은 맺게 되면 그 즉시 효력이 발생하며 뭐 4대보험, 그런 것도 원하면 해드리죠. 구체적인 사항은 계약서 안에 적혀 있고 읽어보시면 됩니다. 지민씨한테도 나쁜 조건은 아닙니다.”

“윤기씨!”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내던 윤기가 멈췄다. 말씀하세요. 까딱 고개를 흔든다. 지민은 믿지 못한다는 어조로 따졌다.



“이게 진짜라구요? 무슨 재벌가 드라마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아니고.”

“제가 재벌입니다.”



 윤기는 덤덤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자세한 상황은 설명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지금 이 계약이 필요합니다. 지민은 윤기를 의심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의 사람이 이런 터무니없는 계약서를 내밀리도 없으며, 자신의 뭘 보고 가짜애인 행사를 해달란 말인가. 게이애인행세를 왜? 짙게 의심하는 두 눈을 바라보던 윤기는 차근차근 풀어 설명했다. 주제는 가짜연애 이야기였지만 겉모습은 흡사 유능한 사업가처럼 보였다.



“지민씨한테도 이쪽이 더 편한 제안입니다. 일주일이면 끝나는 일이니까요. 서로 편한 계약이라고 할 수 있죠.”

“혹시 애인을 집에서 반대하는 건가요?”

“…무슨 말이죠?”

“진짜 사랑하는 분이 있는데 집안에서 뭐라 하니까 방패막이로 쓰는 애인 같은 게 필요한 그런 상황인건가요?”



 지민은 그럴싸한 가설을 만들었다. 게이애인을 하나 만들어서, 진짜 애인은 지키겠다는 그런 로맨티스트인가. 윤기는 피곤한 얼굴을 했다. 무얼 꼬치꼬치 캐묻냐는 듯. 긍정적인 지민의 사고방식을 부순 건 윤기의 깔끔하고도 사무적인 대답이었다.



“전 일회용 관계가 필요한 겁니다.”

“네?”

“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관계요.”



 복잡한 상황이라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 한 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면, 방금 민윤기는 말 한 마디로 곤장을 얻어맞는 수준이었다. 카페에 와서 몇 차례나 어이없음을 겪던 지민은 또 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쉽게, 쓰고, 버리고. 개념이 없다, 없다 속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멀쩡히 두 눈 똑바로 뜨고 있는 사람을 물건취급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사람 좋다는 박지민 인내력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지민은 처음으로 윤기 앞에서 진심을 담아 낮게 감탄사처럼 중얼거렸다.



“와 진짜 기분 드럽다….”

“…….”

“사람이 원래 그래요? 아니면 내가 치면서 머리가 맛이 간 거예요? 아 진짜 어이가 없네.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게 놀랍고, 당신의 사고방식에 두 번 놀라네요. 쓰고 버려? 내가 물건이에요?”

“…….”

“민윤기씨 사정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난 남 무시하고 약점 잡아서 멋대로 휘두르려는 이딴 계약 할 생각 없어요.”



 윤기는 석상처럼 앉아있었다. 미간을 찡그리거나, 화를 내지도 않은 채 지민의 말을 가만 듣기만 했다.



“그리고 너 사람 잘못 봤는데.”

“…….”

“내가 이깟 푼돈에 날 팔만큼 돈이 궁하진 않거든.”



 지민은 서류봉투를 내팽개치듯 던졌다. 서류봉투는 하얀 윤기의 얼굴을 퍽 때리고 떨어졌다.



“야 견적서 문자로 보내라. 한 푼도 빼놓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민이 팩 등을 돌려 나갔다. 그러다 우뚝 멈춰 뒤로 돌았다. 쳐다보고 있던 윤기를 흠씬 노려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쥬스세트를 들었다. 백원 하나도 아까운 새끼한테 주긴 뭘 줘. 빠르게 카페를 통과한 지민은 앞범퍼가 찌그러든 중형차에 탑승했다. 물흐르듯 이어지는 탑승과정에서 카페 쪽 방향을 향해 가운데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아이씨, 왜 하필 쳐도 저런 놈을 쳐서.”



 괜히 일할 시간만 날렸다. 재수 옴 붙었네. 지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엑셀을 밟아 카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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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해 2018.06.18 01:08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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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월 2018.06.18 01:11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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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2018.06.18 01:14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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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잉잉 2018.06.18 01:22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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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비지미 2018.06.18 01:25
    우리 지민이 할 말은 다하는 그런 남자네요 멋있어요! 참지 않을 땐 참지 말아야죠 윤기가 단어 부분에 있어서 실수한 것 같네요 하지만 로코는 투닥투닥 싸우다가 사랑에 빠지는 거니까 이러다가 서로에게 빠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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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peuge 2018.06.18 01:30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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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개한침침 2018.06.18 01:40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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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르으 2018.06.18 02:03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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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월드 2018.06.18 02:35 SECRET

    "비밀글입니다."

  • ?
    굥기 2018.06.19 00:46 SECRET

    "비밀글입니다."

  • ?
    구름엔 2018.06.19 02:03 SECRET

    "비밀글입니다."

  • ?
    필연 2018.06.19 03:46 SECRET

    "비밀글입니다."

  • ?
    hmrwh 2018.06.19 17:35 SECRET

    "비밀글입니다."

  • ?
    이노라 2018.06.20 00:24 SECRET

    "비밀글입니다."

  • ?
    개맹이 2018.06.23 01:45 SECRET

    "비밀글입니다."

  • ?
    솜과사탕 2018.08.06 00:36 SECRET

    "비밀글입니다."

  • ?
    연오 2018.08.27 16:08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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